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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자 수 === 대약진이 부른 대기근은 1958년 가을부터 1960년 말까지 이어졌고, 청평에서는 이를 삼년대기근이라 부른다. 사망자 수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청평 정부의 공식 입장은 1981년 발표된 '비정상 사망 약 380만 명'이다. 이는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줄어든 인구를 단순 합산한 수치로, 같은 기간 출생아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초과 사망은 이보다 훨씬 많다. 1980년대 플로렌시아 인구학자 루카 페라리가 인구 조사 자료를 재분석해 약 700만 명이라는 추정을 내놓았고, 청평 기자 출신 연구자 쩐 반 뚜언은 해외에서 출간한 《이름 없는 묘비》(2008)에서 지방 문서를 근거로 약 900만 명을 제시했다. 앙투안 르베르는 폭력에 의한 사망까지 포함해 1,100만 명설을 주장한다. 1979년 정돈 회의 준비 과정에서 당 내부 조사단이 집계한 수치가 900만~1,000만 명이었다는 증언도 있으나, 문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당시 청평 인구가 약 1억 6천만 명이었음을 생각하면, 인구의 약 4.5~7%가 불과 2년 남짓 사이에 목숨을 잃은 셈이다. 이는 청평이 겪은 어떤 전쟁보다도 큰 인명 피해다. 1944~1945년 식민지기 북부 대기근의 사망자가 10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되는 것과 비교하면, 혁명 정부 아래의 기근은 그보다 일곱 배 이상 큰 재앙이었다. 오늘날 청평의 어용 학자들은 "수백만 명설은 과장이며 실제로는 200만~300만 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해는 지역과 집단에 따라 크게 달랐다. 가장 심각했던 곳은 남령성으로 인구의 15% 가까이가 숨졌고, 화운성도 10%를 넘었다. 강제 하산된 산악 토착민의 사망률은 전국 평균의 두세 배에 이르렀다. 반면 대도시와 북부 해안 공업 지대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고, 남창성처럼 지방 지도부가 대약진 지시를 슬그머니 따르지 않아 피해를 줄인 곳도 있었다. 2013년 공개된 청평 정부의 일부 문건에 따르면 남령성과 해남성에서는 1960년 한 해에만 수백 건의 식인 사건이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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